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초공작전 (문단 편집) === 우문령 전투 === 새벽 5시에 첫 전투가 벌어졌고 소수의 습격부대는 순식간에 대부대로 늘어 세방면에서 공격해왔다. 장휘찬은 2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공산군 40명을 포로로 잡고 1천여명을 사살했다. 공산군 포로들이 주더, 마오쩌둥, 펑더화이가 진두지휘를 하고 있다고 하자 장휘찬은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무리한 공세 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6천명에 불과한 18사단과 달리 홍군은 2만8천명이나 되었고, 장휘찬은 급히 동고(銅鼓)의 잔류부대 등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때는 늦어 좌우의 방어선이 무너져내리고 토벌군은 분산 포위되었다. 거기에 비까지 와 시야가 차단되면서 지형을 잘 모르는 토벌군은 퇴각도 못할 지경이 되었고 지형을 잘 아는 공산군은 더욱 유리해졌다. 결국 30일 오후4시 홍군의 총공격명령이 떨어지자 '철의 사단'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부여단장과 연대장들이 잇달아 전사하고 사단 사령부가 돌파당해 31일 오전 10시에 18사단의 생존자들은 홍군에 투항했고 장휘찬이 포로로 잡혔다. 장휘찬은 마오쩌둥과 동향인으로 마오쩌둥이 호남제1사범학교 시절 (1915년) 함께 학생운동을 한 사이었던 동지였다. 마오쩌둥은 옛동지였던 그를 살려주고 싶었고, 공산당으로 전향할 것을 권유했으나 장휘찬은 거부하였다. 하는 수 없이 우문령 전투 1개월 후 장휘찬을 인민재판에 붙였고, 흥분한 군중이 장휘찬을 참수해 죽였다. 공산당은 장휘찬의 참수된 머리에서 혀를 도려내고 뺨에 구멍을 뚫은 다음에 귀를 판자에 못박아서 붉은 천으로 싼 다음에 난창에 있는 장제스에게 보내는 선물임을 의미하는 흰 깃발을 꽂은 나무상자에 담아 강에 띄워 보냈다. 용강에서 주민들이 그 나무상자를 수습, 장사 교외 악록산에서 장휘찬의 장사를 치러주었다. 한편 국민당 측은 장휘찬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난창의 감옥에 있는 공산당원 백여명을 참수하였다. 한편 18사단의 생존자중 3천명은 홍군에 가담하였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한편 18사단의 전멸 소식을 듣고 구하러 가던 9로군 50사단장 담도원은 즉각 철수하였으나 1월 1일 동조(東詔)에서 18사단에게서 노획한 무기로 무장한 홍군 12군,제3군단,제3군단의 습격을 받아 역시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담도원은 겨우 퇴각하였으나 50사단은 와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오쩌둥은 크게 기뻐하며 시를 지어 이를 축하했다. ||산천초목 서리 맞아 붉게 물들고 천병의 노한 기세 하늘을 찌를 듯 하네. 안개 용강 만한척봉 깊은 골 에워쌌는데 일제히 울려 퍼지는 환호성, 적장 장휘찬을 잡았다네. 이십만 적군 또다시 간장 강을 건너 침범하니 사방에 봉화 일어 하늘을 가렸네. 천만 노동자 농민 불러 모아 함께 싸우니 부주산 아래 홍기 바람에 펄럭이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